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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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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지스님 초파일 법문
작성자 내원사 등록일 2009-06-28
첨부파일 파일 200906281505191.hwp 조회수 3778


법문 중이신 주지스님


관불의식을 하고 계시는 오근섭 시장님


저녁 예불 중인 내원사 유치원생들과 부모님

참다운 의미의 봉축

2009년 초파일 주지스님 법문

요즈음은 시원한 바람과 갖가지 향기로운 꽃, 아름다운 나뭇잎새들이 소생하는 봄날입니다. 이런 좋은 계절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룸비니동산에서 2,600여년 전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후 열반하시는 날까지 인도 광야를 걸어다니시며 중생들을 향해서 계속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부처님 전에 등을 밝히는 것도 큰 공덕이 되겠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한 가지라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참다운 의미의 봉축이며 훌륭한 공덕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최초로 설법하신 것은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됩니다. 중도는 쾌락과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버리고 그 중간도리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어서 그것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라고 하셨습니다.

사성제란 현실세계의 고통(苦)과 그 고통의 원인(集), 고통이 소멸한 상태(滅), 고통을 소멸시키는 방법(道)에 대한 진리를 말합니다. 이 사바세계는 중생들이 갖은 풍랑 속에서 표류하는 苦海의 바다지요. 생•노•병•사와 사랑하는데 헤어져야 하고, 미워하는데 만나야 하고, 구하는데 얻어지지 않고, 육체와 정신의 작용이 치성한데서 오는 고통---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집착, 욕망 때문이죠. 그 집착이 없고 내 마음에 아무런 욕심이 없는 자는 고통이 없습니다. 그 상태를 우리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고통이 없는 상태까지만 말씀하셨다면 불교는 이상적인 철학에 머물렀겠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더 나아가 열반에 들어가는 길, 즉 고통을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중도로서의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바른 길의 ‘바르다(正)’라는 뜻을 아십니까? 첫째,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 또는 요새 흔히 말하는 진보다 보수다라는 생각이 바로 치우친 것입니다. 둘째, ‘전도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좋고 나쁜 것을 규정하여 현상을 잘못 이해하지요. 이렇게 왜곡된 것이 전도입니다. 셋째, ‘망령되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처럼 자신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게 되면 상상, 공상, 망상을 덧붙여 망령된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 국가 간의 전쟁, 종교 간의 골이 왜 생겼겠습니까? 어쨌든 위의 세 가지를 벗어난 것이 바로 ‘바른 것’이며, 그것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팔정도의 첫 번째는 바른 소견(正見)입니다. 정견을 성취한 사람은 모든 사물과 이치를 바르게 보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올바르게 본다..... 이건 불가능하죠. 항상 바른 것의 이면인 그른 것만을 보며 전도되게 사는 게 바로 중생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서글프죠. 그러나 힘내십시오. 부처님 법을 자꾸 접하며 우리 몸과 마음에 익게 하면 언젠가 우리 모두 중생을 뛰어넘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시초가 바로 정견입니다. 바른 소견이 있어야 바른 믿음이 있고 바른 깨달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른 생각(正思惟)입니다. 서구에서는 오래된 성당과 교회에서 명상을 하는 불교적 사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은 어떤 악행을 짓더라도 하느님께 고해성사만 하면, 하느님께서 다 해결해 주신다고 하지요. 저는 개인을 버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상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서구에선 2,000년이 넘는 기독교 문화를 벗어나 불교에 열광하는 걸까요? 이제야 우리에게 행복과 불행을 주는 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은 겁니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의 근원인 에고(ego)를 버리고 세속적 욕망을 벗어나려는 바른 사유, 깊은 사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바른 행동(正業)입니다. 이 우주에는 불멸의 법칙이 있습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을 안다면,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과도한 음주나 약물복용 등을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오늘 등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5계를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업이 깨끗해지며 그것을 지키는 즐거움이 생기게 됩니다.

넷째, 바른 말(正語)입니다. 말과 관련된 것이 十惡 중에 네 가지나 되지요. 다른 이에게 험한 말을 하고 이간질하고 아첨하고 거짓말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부드러운 말과 진실된 말만을 해야 합니다.

다섯째, 바른 생계수단(正命)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당혹해 하시는데, 바른 생계수단, 직업생활의 핵심은 오로지 나의 생계만을 위해서 상해, 살상, 노략질, 폭력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불가피하게 희생시켜야 한다면 한없는 자비심을 가지고 좋은 에너지를 보내십시오. 자신을 희생시킨 그 공덕으로 깨달음에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섯째, 바른 노력(正精進)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라고 고생하며 노력하는데 헛수고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괜히 고생만 하고 소득이 없는 사람들의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른 노력은 바른 소견에서 나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은 결과가 나오는지는 정견을 통해 알게 됩니다. 정견을 갖추어야 바르게 사유하고, 바르게 말하며, 바르게 행동하며, 바른 직업생활을 하며, 그 과정에서 열심히 바른 노력을 하여 좋은 결과를 갖게 되는 겁니다. 이제 정견이 팔정도의 맨 첫머리에 나온 이유를 아시겠지요.

일곱째, 바른 마음챙김(正念)입니다. 어떤 행동과 생각을 하든 그것을 직관하면, 그때 그때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알아차리고 삿된 짓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덟째,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만약 앞의 일곱 가지를 잘 실천했다면, 감각적 욕망을 벗어나면서 의식적인 번뇌와 무의식적인 번뇌가 사라지며 선정의 희열과 즐거움이 생깁니다. 세상의 감각적 쾌락 뒤에는 허탈감과 공허함이 남지만 바른 삼매를 통한 희열과 즐거움은 한없는 평화와 안락을 줍니다. 그러나 이 또한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삼매가 깊어지며 선정의 희열과 즐거움도 벗어나면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심과 바른 알아차림의 청정이라는 선정에 들게 됩니다. 이와 같은 바른 삼매는 지혜와 짝을 이루어 진리를 보게 하며 그 진리를 보는 순간 우리를 끊임없이 생사에서 윤회하게 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제거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법을 통해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해탈도를 추구하게 되고 그에 따라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른 생계수단을 통해 눈, 귀, 코, 입, 몸, 마음이라는 6가지 감각기관을 잘 단속하면서 항상 언제나 방일하지 않고 몸과 마음에서 나타난 현상들에 대해 분명하게 마음을 챙긴 채 바르게 알아차릴 것입니다.

요즘, 제 2의 IMF다, 돼지독감이다 해서 사회적으로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결국 우리의 과도한 욕망과 집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태산과 같은 욕망만 가지고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2,600여 년 전에 우주의 진리를 깨쳐 부처가 되셨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중생으로 남아 있습니까?..... 다 내려놓으십시오.

오늘 이 내원사 법당에서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것을 듣고 여덟 가지를 모두 실천할 수는 없지만 집착에서 벗어나 한 가지라도 죽는 그날까지 실천하고 싶다는 한 생각만이라도 일으킨다면 오늘 부처님 탄생을 봉축하는 공덕이 하늘을 덮고도 남을 것이며,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결국에는 열반을 증득하실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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