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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 소개

H > 내원사 소개 > 화산당 수옥스님

비구니 화산당 수옥화상의 약력(華山堂 守玉 比丘尼 葯曆, 1902~1966)

비구니 화산당 수옥스님의 속성은 정씨요 본관는 동래이다. 구한말 순종 임인년 (1902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진해시 자은동에서 아버지 정태익 어머니 어씨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혼기가 닥쳐서도 결혼할 생각이 없이 수도생활을 그리워 하였다. 그런 마음이 점차 굳어지자 16세 되던 해에 부모님 모르게 집을 나와서 해인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곳은 비구스님들의 수행처로 받아주지 않자 수덕사 견성암으로 찾아갔다. 그리하여 17세 되던 해에 비구니 법희선사를 은사로 비구 청월선사를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19세 되던 해에 불교 교학에 공부할 뜻을 두고 불교 전문 강원을 찾아 해인사에서 고경화상의 가르침 아래에 2년간 사집과를 수료하였다. 그 다음 서울에 올라가서 서대문 응선암에서 대은강사를 모시고 사교과와 대교과를 28세 봄에 수료하였다. 이렇게 불교 전문 학과를 이수하고 그 해 4월 해인사에서 용성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그 후 선방에 입방하여 수선안거(修禪安居)를 5년간 하였다.




1934년 33세 되던 해 3월에는 해외 유학에 뜻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시(京都市) 묘심사의 불교종립학교인 미농니중학림(美濃尼衆學林)에 들어가서 3년간 전문과정을 수료하였다. 36세 되던 해 3월에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서 상주 남장사의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로 취임하여 3년간 학인을 가르쳤다. 39세 되던 해 10월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와서 7년간 참선수행하였다.
46세 되던 해 3월 서울 동대문구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로 취임하여 3년간 후진양성에 정진하였다.
50세 되던 해 7월 충남 예산 보덕사(報德寺) 주지에 취임하였고 1955년 54세 되던 해 3월 15일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동년 4월에는 조계종 종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이 후 4대를 역임하였다.

당시 6.25사변 이 후 천년고찰이던 내원사가 한줌의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중창재건 대원력자를 물색하던 중 화산당 비구니 수옥스님을 선택하게 되었다. 스님은 당시 조계종의 중년대덕으로 승속간에 덕망이 높으므로 이런 대찰 중건의 대작불사를 능히 감당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주지로 취임하신 이 후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우려 중창불사를 완성하고 도량을 정비 하였다.
이 중창 불사 완성으로 1959년 4월 25일 경남 도지사로부터 내원사 중창공로상을 받고 또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부터 내원사 중창 공로상을 받았다. 1962년 8월 15일에는 대통령 권한 대행 국가재건최고 회의 의장으로부터 문화재 보호 공로상과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4년 12월 20일에는 조계종정으로부터 내원사 중창공로상을 받았다. 1965년 6월 25일에는 조계종정으로부터 모범승려의 의장상을 받는 등 불교계의 유공자일 뿐만아니라 모범적인 승려로 길이 남을 분이다.
1966년 2월 7일 약간의 숙환으로 내원사에서 표현히 입적하셨다. 춘추는 65세였다.

양산 내원사 비구니 화산당 수옥화상비문(梁山 內院사寺 比丘尼 守玉和尙碑文)

(소재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천성산 내원사)

천성산의 깊은 곳에 내원사가 자리했네 천여 대중 함께 모여 합장하고 청법한 후 정, 덕, 지혜, 두루 갖춰 명문 귀가 선망하되
출가입산 스님되어법희스님 시봉타가 내외학을 박통하고 후진양성 업을 삼다.
어느 때는 가르치고 유시에는 연좌하니 제자들이 힘을 모아 이 비석을 세우노니 한국에는 사씨니요, 내원사엔 수옥일세.

원효스님 상정에서 화엄경을 설하실 때 수옥 스님 주산되어 설법교화 하였도다. 세상영화 뒤로하고 선재동자 구법하듯
일본유학 마친후에 고국으로 돌아왔네. 선, 경, 율을 겸수하여 내원사를 중흥하며 배출시킨 선교제자 그 수효가 한량없네.
인도에는 대애도요, 중국에선 정검니며, 억천겁이 지나가도 빛난 행업 영원하리.

제 32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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