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 속 명상

H > 선해일륜 > 생활 속 명상

제목 내원사의 보배 도연노스님 입적
작성자 내원사 등록일 2009-07-04
첨부파일 조회수 4363


내원사 노스님 한 분이 입적하셨다.

법랍 59세, 세납 99세

평생을 옷 한번 제대로 맞춰 입지 않으시고 짜투리 천으로 옷을 해입으시고,

승복사 하나 없던 시절에 수좌들이 옷감을 싸들고 오면

흔쾌히 밤새 바느질하여 아침 길에 곱게 보자기에 싸서 내놓으시던 스님.

 

지금도 생각난다.

우산대가 부러져 여러번 고쳐쓰다 더이상 재활용이 힘들 것 같아 창고에 버려진,

우산의 방수천을 일일이 벗겨내어

월남 주머니를 만들어 대중 스님들에게 낱낱이 보시하시던 스님.

90년대, 그때도

혹여 눈이 안좋으신 노스님이 이런 걸 보면 가져다 밤새 바느질 하시느라

건강을 해친다고 창고에 숨겨놓으면 번개처럼(!) 나타나서 벗겨들고

지팡이 휘저으며 휘청휘청 걸어가시던 노스님.

2006년 3월 소임을 살러 왔을 때,

한 손으로 천주를 돌리시며

덕담 한 마디와 함께 내주셨던 월남주머니...... 아직도 잘 쓰고 있는데.....

 

대중에서 사는 것이 큰 복이라시며

평생을 입선과  발우공양을 빠지지 않으셨는데,

발우끈을 제대로 못 묶게 되고 수저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자

방으로 상을 날라드리겠다고 하자

두 다리 뻗고 엉엉 우셨다는 노스님.

 

2006년 섣달 문지방을 넘어가시다

고관절이 부러져

병원에 가신 후로 칠곡 영불원에 가셔서 요양을 하시면서도

정신이 드시면

'내원사 가자, 내는 내원사 가서 죽을란다.'

라고 하셨다는 노스님.

 

여러번 모셔오려 했으나, 시절 인연이 안 되었는지.....

결국 가신 다음에야 내원사에 모시게 되었다.

 


6월 20일 초재에 참석하신 상좌 스님들(왼쪽 첫번째가 진아스님, 두번째가 운문사 주지이신 진성스님)

 

우리 같이 젊은 스님들의 기억엔

사중 물건 끔찍히 아끼시고

밤낮 지장경을 읽으시며 천주를 돌리시던 노스님이지만,

옛스님들의 기억엔 대중의 외호와 수행을 놓치지 않으셨던 분이다.

 

많은 스님들이 그와 같은 청빈과 정진의 공덕을 칭송하는데,

선원장스님께서 도연노스님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큰 공덕을 지으셨다고 하신다.

<6.25전에 봉암사에 계시던 성철스님, 향곡스님, 청담스님 등 결사대중 6~7명이 빨갱이로 오인받아 경찰서에 잡혀가신 일이 있단다. 민심이 흉흉하던 때라 잡혀가면 즉결처분, 총살감이었던 때이다. 그때 도연노스님이 보살로 봉암사에 공양을 갔는데, 청담스님의 어린 상좌 하나만 울고 있더란다. 상주에서 꽤나 힘있는 주류층이었던 도연스님은 친정집에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날로 한국 선불교의 기라성같은 스님들을 석방시킨다. 그분들의 족적을 생각하면 참 가슴 쓸어내릴 일이다. 당시의 그 어린 스님은 입적하실 때까지 도연노스님의  안부를 물으며 그렇게 고마워하셨단다.>

2008년 간행된 <삼현문보>에 나온 도연노스님의 행장을 소개하겠다.

 

스님의 법명은 도연이다. 본관은 함영이며 이름은 김차임이다. 1911년 2월 22일 경북 상주군 함창면 신흥리에서 아버지 김형진과 어머니 황보리심 보살 사이의 2남 4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출가  전부터 불심이 깊었던 스님은 월혜스님이 윤필암에 계실 때 10여년 동안 윤필암을 다니면서 신심을 다졌다. 스님들을 보며 출가할 마음을 굳힌 스님은 1940년 40세의 늦은 나이에 윤필암으로 입산하였다. 그러나 속가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출가하기 위하여 경주 보리사로 가 1941년에 자운화상을 계사로 수옥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45년 범어사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사미니계를 받은 해 여름, 스님은 비구니 스님들께서 성철스님을 모시고 공부하고 있던 마산 멸빈암으로 가서 공양주를 살며 능엄주와 108대참회를 하며 수행하다 대성암 만성스님 화상으로 옮겨 정진하였다. 다시 윤필암으로 돌아가 정진하던 중 스님은 불교 정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추운 겨울 날 조계사 마당에서 기도하며 열정적으로 교단정화에 동참하였고, 단식농성을 할 때에는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다.

스님은 정화운동이 실마리를 찾을 즈음 대구 동화사에서 하안거를 성만하고 대승사에서 삼동결제를 마친 후 내원사로 가 하안거를 난다. 안거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은사이신 수옥스님을 만나 다시 내원사로 들어간 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공양주,채공, 별좌, 원주를 혼자 도맡아 보면서 생활하였다.

그해 겨울부터 내원사는 불사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주지스님은 양산경찰서를 찾아가 "후래 중생들을 위해 집을 지어야 하니 벌목을 허락해 주시오."하고 청을 하였다. 그러나 허가는 나지 않았고, 그대로 강행한 불법 벌목으로 경찰서로 연행된 스님은 은사이신 수옥스님의 간쳥으로 풀려나와 불사를 원만하게 진행하였다. 지금의 내원사의 선해일륜, 익성암 등에 쓰인 목재는 당시 천성산에서 벌목한 나무들이다.

당시 내원사는 사찰 소유의 논 100여 마지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소작을 주고 있었다. 소작료로 쌀 네 말 정도를 받았는데 20~30명의 대중들이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은사이신 수옥스님이 직접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고 "후래 중생들이 걸망을 벗어놓고 공부할 곳은 이곳밖에 없으니 다 함께 농사를 지어 생활합시다."하니 많은 스님들이 절을 떠나고 겨우 8명만이 남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대중들도 다시 모여들었다.

그러나 은사이신 수옥스님은 불사를 하는 동안 고생을 많이 하셔서 불사를 마치고 10년 만에 입적하고 만다. 스님은 그 시절을 떠올리면 은사스님이 생각나 가슴이 저려온다고 한다.

선납자로서의 스님의 행장 또한 뚜렷하다. 범어사 대성암에서 만공스님에게 인가받고 만성스님 회상에서 여러 철을 났으며 대구 부도암에서 안거를 하면서 효봉스님의 법문을 듣고 지도를 받았다. 스님은 유마거사의 불이법문과 방거사의 가족이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를 가장 감명깊게 들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신다.

한 번은 명성스님이 강사로 재직 중이던 선암사에도 머물렀는데,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규로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내원사로 돌아와 머물다가 월내 묘관음사에서 향곡스님을 모시고 동안거를 났다.

당시 묘관음사는 사부대중이 함께 정진하던 곳이었다. 다시 승가사와 김룡사 등 여러 선방을 다니면서 정진하다 내원사로 돌아와 지금까지 거주하고 계신다.

평소 소일거리 삼아 손수 재봉틀을 돌려 손주상좌들이나 아는 스님들에게 필요한 옷이나 물건을 만들어 주던 스님은 세수 90이 넘으면서 건강이 악화되어 산문 밖을 출입하지 못하신다. 그래서 법당에 갈 수 없을 때에는 방에서라도 법당을 향하여 예불을 드리고 사시에는 큰방에서 발우공양을 하며 항상 지장경을 독송하며 수행하신다ㅏ.

'늙으면 추해지니 젊을 때 열심히 정진해라'하시며 상좌들에게 공부할 것을 강조하는 스님은 상좌들이 절에 모셔가고 싶어해도 대중에서 살지 않으면 중노릇이 아닌 걸로 생각하는 보배같은 스님이다.

다음글 내원사 3대 주지 안혜운스님 행장
이전글 초파일 행사 이모저모2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