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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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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원사 3대 주지 안혜운스님 행장
작성자 내원사 등록일 2009-07-03
첨부파일 조회수 4136


1971년도의 안혜운스님

스님의 법명은 혜운이고 법호는 진금이며 이름은 안말례이다. 1911년 1월 20일 경기도 양주군 동부면 배알리에서 문성공 23대 자손인 아버지 안군경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스님은 깊은 불연으로 세 살 때부터 서울 미타사에서 성화스님의 보살핌으로 자랐는데 애석하게도 부모와 같던 성화스님은 스님이 7세 되던 해에 입적하였다.

미타사에서 도량 청소와 염불 등을 익히며 수행자로서의 기초를 익힌 스님은 1924년 14세에 미타사에서 청호화상을 계사로 정행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22세인 1932년 3월 28일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당시의 노스님들은 종종 젊은 스님들이 학문을 배우면 못 쓴다고 생각해서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았는데, 마침 보문사에 강원이 신설되어 스님은 금룡스님, 정명스님, 명주스님 같은 강사스님들로부터 초발심자경문과 법화경, 금강경, 능엄경, 화엄경 등을 배우고 1936년 해인사 삼선암에서 대교를 마친 후 사교입선하게 된다.

스님은 수행의 길에 들어선 이후 많은 불사를 하였는데, 31세인 1941년에 처음으로 광주 무등산에 자운암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직접 나무를 자르고 날라서 지은 자운암이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불편한 점이 많자 조선대학교 뒤편에 다시 신광사를 짓게 된다. 그러나 이곳 또한 길이 없어 앞을 지나가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많았다. 결국 예전에 논으로 쓰던 땅을 사들여 지금의 신광사를 건립하였다.

이후로도 스님은 여러 도량에서 많은 불사를 했으며, 특히 구례 천은사의 주지를 맡았을 때, 6.25 전쟁으로 기울어진 도량을 중수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70년에는 양산 내원사에서 논 이전 소소을 통해 농지를 정리하고 기와 불사 및 수도와 전기 시설을 갖추는 등 사찰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불사는 스님의 변함없는 기도정진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신광사 대웅전을 지은 스님은 지공, 나옹, 무학 등 3대 화상을 모시고 천일기도를 하여 3년 만에 불사를 마치는 저력을 보였다.

1974년 청도 운문사 주지로 취임한 뒤 땅문서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스님은 사리암에서 기도를 올렸다. 기도 3일째 되던 날 엎드려 절을 하던 스님은 누더기를 걸친 노장님이 하천 평지에 무엇인가를 놓고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침 사리암에서 기도하던 스님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그 스님은 주지스님의 기도가 효험을 발한 것이라며 전주지였던 스님을 찾아 만나 보라고 권해 주었다. 이에 스님이 시자 두 명과 함께 당시 마을에 거주하던 전주지스님을 찾아가 정중하게 땅문서 있는 곳을 묻자 스님의 공손한 태도에 놀라워하며 땅문서 있는 곳을 일러주었고, 스님은 그것을 찾아 청도 법원에 등기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운문사의 땅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사리암 독성님 개금불사를 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스님의 꿈에 나한님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거나 엎어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이 노장님께 꿈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독성님께만 불사를 해드리고 나한님을 해드리지 않아서 그렇다고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스님은 나한님들도 개금을 해드렸다고 한다.

현재 사리암의 독성님이 계신 곳은 원래 법당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었는데, 법당을 꾸미고 나서 나한님의 계시를 받아 아래쪽 굴 밑에 사람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스님의 기도를 통해 이뤄졌다.

1975년 스님은 운문사 주지를 사임하고 보덕사와 신광사 선원에서 안거를 하였다. 1985년에는 고암스님을 모시고 미국 오하이오 주에 보광사를 개원하였으며, 다음해에 광주 신광사의 주지를 사임하였다.

기도를 생활의 일부로 여기며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스님은 간혹 젊은 스님들이 라면이라도 먹으려 하면 다 쫓아낼 정도로 엄격하였다. 때문에 '호랑이 스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임을 보면서도 안거철에는 항상 결제대중과 함께 정진한 스님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비구니 구족계 전계화상을 역임하고 2008년에 명사 품계를 수지하였다. 세납 98세, 법납 95세로 2009년 4월 2일(음 3월 7일) 입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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