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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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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제일선원

묘리 법희(妙理 法喜 1987~1975)

법희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남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태어나셨다. 네 살에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동학사 미타암으로 출가하여 14세에 귀완스님을 은사로 동운(東雲)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으며, 다시 동학사로 돌아와 만우강백(萬愚講伯) 회상에서 사집(四集)과 사교(四敎)를 마치셨다. 23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2년여 동안 남쪽지방으로 운수납자행을 하셨다.

25세에 경북 김천 청암사에 머물러 《법화경》을 보던 중 사교입선(捨敎入禪)의 뜻을 세우고 당시 제방에 법력을 크게 떨치던 수덕사 만공선사를 찾아가 법제자가 되기를 청하여 만공회상에 입방하였다. 만공스님으로부터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 하나는 무엇인가 (萬法歸一 一歸何處 一是甚?)’ 라는 화두를 받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의
일상생활 전체가 참선으로 시작해서 참선으로 끝나도록 애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27세에는 자신이 당시 치사율이 높은 천연두에 걸린 것을 알고 견성암 뒷산으로 올라가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도 화두를 놓지 않고 한 달여를 칩거한 끝에 죽음을 물리침과 동시에 심안이 열리게 된다. 이후에는 맡은 소임이나 대중 운력이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일하는 동시에 생각은 선정에 드는 경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 모두 한마디씩 일러보라』
하심에 법희스님이 대중 속에서 단정히 일어나 큰스님께 답하기를,
『 고기가 가니 물이 흐려지고(魚行水濁) 새가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鳥飛毛落).』하셨다.
만공스님의 날카롭게 쏟아지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법희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만공스님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 음, 공부가 제법 익었구나.』라고 하셨다.
또 하루는 만공스님께서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조각조각 흩날린다’라고 한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물으시기를,
『 흩날린 꽃송이는 어느 곳에 있는고? 』
하니 법희스님께서 조용히 일어나서 말씀드리기를,
『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一片地).』
이에 만공스님이
『 그렇지. 다만 한 조각 땅을 얻었을 뿐이니라(只得一片地).』하셨다.
어느 날인가 만공스님은 시자를 시켜 각 암자와 큰절에 기별하여 산중 대중을 모두 법희스님이 머물고 있는 견성암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 내 요즘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짰지. 오늘 그 그물에 고기 한 마리가 걸려들어 살려 달라고 버둥거리고 있거든. 자 어떻게 이 고기를 살릴 것인지, 그대로 죽게 내버려둘까? 어디 대중은 한 마디씩 일러보아라.』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음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살얼음판을 걷는 듯 긴장된 분위기였다. 조금 있으니 한 수좌가 일어나 머뭇거리며 무어라 입을 떼려 했다.
『 옳지. 드디어 한 마리 걸려들었구나.』
만공스님은 그물을 낚아채는 시늉을 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였다. 스님의 장난기로 다소 여유가 생긴 대중은 한 사람씩 용기를 내어 자기 소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만공스님은,
『 음, 또 한 마리가 잡혔구나.』
라며 무릎을 두드리고 손뼉을 치며 눈물이 나오도록 웃었다.
『 옳지, 옳지! 오늘은 아주 많이 잡히는군.』
팔을 걷고 고기를 움켜쥐는 시늉을 내는 사람, 낚싯대를 던지는 동작을 하는 사람, 그물을 찢어 버리겠다는 사람 등 여럿이 만공스님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도
『 음, 또 한 마리. 어허, 웬 눈먼 고기가 이리 많누.』
하며 모두들 잡아들이자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뒤편에 앉아 있던 법희가 슬그머니 일어나 만공스님에게로 다가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 스님, 차공양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오! 이제야 눈밝은 수좌를 만났군. 그래, 살림살이가 언제부터 그리 넉넉해졌는가? 』
라며 크게 기뻐하셨다.

만공스님은 이렇게 서너 차례 법희스님의 오도를 시험해 보고는 얼마 후 드디어 그의 깨달음을 인가하며 ‘묘리당(妙理堂) 법희’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1916년 법희스님의 나이 30세의 일이다. 이때 만공스님은 전법게와 함께 말씀을 전한다.
『 희수좌는 득력(得力)했어. 마침내 장부일대사(丈夫一大事)를 마쳤지. 그러나 마음의 본성 자리를 찾아내는 일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오후(悟後) 수행이야. 깨달은 후에 내가 깨쳤네 하는 생각에 머무른다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일밖에 남는 게 없어. 이제부터 자네는 오후 수행에 전념하고 금생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할 생각 말게나. 요즘 사람들은 용심이 지나쳐 시기하는 자가 많으니 자네의 시절인연(時節因緣)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
만공스님의 당부를 받은 법희는 이후 평생 동안 그 말을 지켰다. 비구니 도인스님이 났다는 소문은 곳곳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법을 듣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문하에 들어왔지만 단 한 번도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공부하는 수좌들을 위하여 손가락 마디가 괭이가 되도록 후원일과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선승들을 제접함에 있어서 이와 같이 말없는 가운데 무진법문을 열어 보이셨으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교화되어 오체투지토록 하셨던 것이다.

스님은 오도 후 입적하실 때까지 60여 년 동안 한국불교 비구니 제일선원인 견성암을 주처로 하여 덕산 보덕사, 천성산 내원사, 사불산 윤필암, 화엄사 구층암, 서울 정릉동 인수재(尹大妃의 처소) 등지를 오가며 제2, 제3의 참선도량을 이루었다.
노년기 70여 세에 다시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서 원장으로 추대되어 크게 선풍(禪風)을 떨치며 한 세기 가까이 출가 수행자의 길을 여법하게 걸으셨으면서도 법어(法語)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신심돈독과 계행청정으로 온 삶을 보내신 스님은 1975년 3월 9일 , 세수 89세 법랍 85세를 일기로 세연을 다하셨다.

만상이 적멸함은 석가의 얼굴이요
적멸이 멸하여 다함은 진귀조사(眞歸祖師)의 면목(面目)이로다
부처님이 몸을 나투신 지 2, 3천 년에
묘리(妙理)의 참다운 빛이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는구나.
萬像寂滅釋迦面 寂滅滅已眞歸面 佛祖遷化二三千 妙理眞光永不昧

- 만공스님의 전법게

담연 선경(膽然 禪敬 1904~1994)

선경스님은 1904년 5월 20일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라는 산촌에서 부친 노씨 모친 고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8세에 마곡사 영은암 명덕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14년 동안 노스님을 시봉하여 지내다가 덕숭산 수덕사 만공선사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선방을 찾아나섰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첫 결제를 하여 만공스님께 나아가 삼배를 드리고 화두를 청했더니,

『머리도 모르고 꼬리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화두냐』고 고함을 치시니 가슴에 분한 마음이 맺히어 사생결단하고 참선공부에 전념하였다.
그 후 윤필암 청안선사회상에서 정진하던 중 <밑없는 철배를 타고 육지에 행하여도 걸림이 없음을 알아라> 는 글을 보는 순간 의심이 화톳불에 눈녹듯 스러지고 마음이 확 열렸다.
그 후 제방을 유력하며 만행정진(萬行精進)을 하다가 예순이 되어 내원사 입승을 맡게 되었다. 어느해 섣달 향곡선사가 열반에 드시기 얼마전 내원사에 오셔서 대중들에게 이르시길,

『만문수가 여기 나타났으니 진문수를 찾아내라』하시었다. 그러자 선경스님은 장삼을 입고 조실방에 찾아가 아뢰길,
『만문수, 진문수, 역대조사(萬文殊, 進文殊, 歷代祖師) 천하의 모든 노화상이 다 내 콧 구멍에서 나왔습니다』
향곡스님께서 되물으셨다.
『콧 구멍이 어디 있는고?』
『본래 콧구멍은 없지만 어디라고 말할 수 없어서 그렇게 나왔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참 공부도 많이 하고 애도 많이 썼습니다. 이제 쉬시고 젊은이들 탁마나 해주시오』라고 말씀하시었다.

스님께서는 32세에 공부를 시작한 이후 평생을 오직 한 마음 밝히는 본분사와 수좌제접(首座提接)에 힘을 기울였을뿐이니, 그 삶의 조촐한 모습은 그대로 수행자의 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스님께서는 법납73세, 세수 91세 되던해에 공주 금강암에서 입적하셨으며 부도는 내원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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